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협동농장 터

1929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설립되어 1937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중치르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소비에트연방의 대표적 고려인 콜호즈이다. 북극성 콜호즈는 소비에트연방에서 가장 성공한 집단 농장으로서, 김병화의 지도력이 농장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김병화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김병화 콜호즈라고 불렸다. 1929년 12월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미하일롭카 지역 리포브카 마을에 북극성 콜호즈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농지 규모는 500여㏊, 농민의 수는 약 20가구였다. 이후 50여 가구로 구성원이 확대되었고, 1931년  같은 지역의 랄리츠 마을까지 확대되었다.
1937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스레드네 치르칙스키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토지 768㏊ 규모의 벼생산 농장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북극성의 규모는 123가구, 290여 명이었으며 소, 양, 염소 같은 가축도 사육하였다. 강수량 부족으로 벼농사는 점차 어려워졌다.
북극성 콜호즈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김병화가 농장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이다. 김병화는 소비에트 연방군 하급 장교 출신이었는데 콜호즈 ‘노비 푸치[새로운 길]’ 농장장으로 부임하여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김병화는 1941년 북극성 콜호즈를 이끌면서 벼농사뿐만이 아니라 면화 재배도 시도하였다. 벼와 면화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했고, 이러한 공헌을 인정받아 김병화는 1949년과 1951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다.
북극성 콜호즈의 전영섭, 김창세, 리 니콜라이, 김 니콜라이, 허 세르게이 등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수상했다. 특히 김창세는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김 니콜라이는 벼나 면화 재배 외에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하였다.
김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두각을 나타냈다.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김병화의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통합하여 규모를 늘려 나갔다.
1953년 마지막으로 아훈바바예프 콜호즈를 흡수했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까지 증가했고, 주요 작물은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1962년 콜호즈는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가 되었다.
1974년에 김병화가 세상을 떠나자, 북극성 콜호즈는 국가적 차원에서 김병화 콜호즈로 개칭했다. 1970년대~1980년대 북극성 콜호즈는 여전히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콜호즈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콜호즈 체제의 붕괴, 급속한 공업화와 이농 현상 등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김병화 콜호즈는 우즈벡인이 만든 조합 형식의 협동 농장으로 바뀌었다.
현재 콜호즈 입구에는 콜호즈 기념비와 김병화 박물관이 남아있으며 소수의 고려인들만이 남아 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 (201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