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성 룽징 서전서숙 터

서전서숙(瑞甸書塾)은 1906년 10월경 세워진 민족주의 교육기관이었다. 학교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이상설(李相卨)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연해주를 거쳐 북간도에 정착하였다. 한인이 많이 거주하던 육도구(六道溝, 현 용정)에 자리를 잡고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황달영(黃達永)·박정서(朴禎瑞) 등과 함께 학교설립에 나섰다. 학교는 약 70평정도 되는 천주교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고쳐 사용하였고 이곳 지역명인 ‘서전(瑞甸)’을 본 떠 이름을 서전서숙이라 하였다. 이상설이 숙장이 되었으며 이동녕과 정순만이 서숙의 운영을 맡았다. 교원 월급·교재 등의 경비는 그가 서울을 떠날 때 저동(苧洞)에 있던 집을 팔면서 마련한 자금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서전서숙은 설립 초기 신교육에 대한 이해가 없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입학을 권유해야만 했으나, 점차 학생 수가 늘어 1907년 폐교할 무렵에는 70여 명이 되었다. 초기 갑(甲)·을(乙)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갑반은 고등반이며, 을반은 초등반이었다. 이후 갑·을·병(丙)반으로 나누어져 갑반 20명, 을반 20명, 병반 34명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교과과정으로 역사·지리·수학·국제공법·헌법 등 근대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민족교육이었다. 교원은 학교설립에 참여한 사람들이 맡았다.
이상설은 갑반의 산술을 맡아 『산술신서(算術新書)』 상·하권을 저술하여 가르쳤으며,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 김우용(金禹鏞)은 산술, 여준(呂準)은 한문·정치학·법학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9~10월경에 운영이 어려워 폐교되었다. 이상설이 1907년 4월 헤이그 밀사로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블리디보스토크로 떠나면서 운영비가 부족해졌고,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감시와 방해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1908년 7월 1일 일제는 일진회(一進會) 회장 윤병갑(尹炳甲)을 내세워 문을 닫은 서전서숙 건물을 사들이고 간도보통학교(間島普通學校)로 사용하였다.
서전서숙의 폐교 후 명동촌에서는 이를 계승한 명동학교(明東學校)가 세워졌다. 서전서숙의 교원이었던 박정서는 숙장이 되고, 여준은 교원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수학한 김학연과 남위언도 교원이 되었다. 용정실험소학교의 운동장 일대가 서전서숙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용정실험소학 내에 1995년 용정항일역사연구회에서 세운 서전서숙기념비가 있고 비석 옆에는 ‘이상설정(李相卨亭)’이 세워져 있다. 학교 내 위치하고 있어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사전협의 없이 학교를 들어가는 것이 제한되어 방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201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