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본명 윤식)은 1903년 전남 강진 출생. 1915년 강진공립보통학교(금릉학교가 1911년 개칭한 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구두에 숨겨 넣고 고향으로 내려와 김현상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 이에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거두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또 다음날인 24일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이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어, 동지 11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최종적으로 무죄 확정. 하지만 재판 과정 동안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1920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동학교 영문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 창작에 몰두하였다. 김영랑은 1950년 9월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 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 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제작 : 202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