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김광제 묘

김광제(金光濟, 1866~1920)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에서 출생하였다. 23세인 1888년 관계에 진출한 이래 훈련원 첨정, 비서원승,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같은 해 12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지배층의 외세 의존적 자세와 가렴주구를 비판하였다. 이 상소로 고군산도로 유배 당하였다 2개월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출판사인 대구 광문사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국채보상운동 발기연설문’을 작성, 낭독하고, 부사장 서상돈과 함께 2월 21일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라는 공함문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함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실천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 언론기관들의 적극적 호응을 얻은 결과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고종황제로부터 노동자, 인력거꾼, 기생, 백정에 이르는 다양한 국민의 참여와 단연, 비녀, 가락지 등을 모아 국채를 보상하자는 보상회로 발전했고, 조선 말기 국권회복운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국민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 직후까지 대한협회에서 지부설립과 강연 활동을 하였으며 1910년대에는 마산에서 ’마산문예구락부‘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문예 활동을 펼쳤다.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동경유학생들과 제2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국내외에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같은 해 조선노동대회 회장과 경성본부장을 역임하는 등 왕성한 강연과 노동운동을 펼쳤으나, 마산에서 7월 20일(음, 6월 9일) 초대된 저녁 식사 후 갑작스런 복통으로 사망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제작 202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