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옥(崔養玉, 1893∼1983)은 1893년 음력 12월 5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횡성에서 3·1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김가진이 총재로 있는 대동단(大同團)의 조선지부 책임자 신덕영·노형규 등과 함께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11월 일본 경찰에붙잡혀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26년 출옥한 후 다음 해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안창남·김정련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을 조직했다. 대한독립공명단은 무관학교를 세우고 병사를 양성하여 일본과의 전면전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그 후 독립운동자금 마련이 여의치 않자 군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독립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하기 위해 김정련·이선구와 함께 1929년 4월에 국내에 잠입했다. 1929년 4월 18일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과 화도면의 경계인 마석(마치)고개에서 이곳을 지나던 우편차량을 습격해 군자금을 확보하고 천마산 산중으로 도피하여 자금을 분배한 후 서울로 들어가려다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하다가 결국 같은 달 21일에 체포되어, 1929년 12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인천소년형무소장 등을 역임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2년 여의 재판 끝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80년 고향으로 낙향하여 선친의 묘를 돌보며 마지막 효를 다하다 1983년 별세했다.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고향, 선친 곁에 묻히기를 원해 현재 위치에 묘가 있다. 최양옥의 출생지인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는 현재 횡성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낙향하여 살던 전촌리 집 터는 현재 채소밭으로 변해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일 202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