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이천시 독수리소년단 기념비

‘독수리소년단’은 1939년 장호원 제일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박영순과 장호원 제일심상소학교 재학생 13명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한자로는 ‘황취(荒鷲)소년단’, 우리말로는 ‘독수리소년단’이다. 박영순을 단장으로 한 열네 명의 ‘독수리소년단’은 학교를 마치면 단장 박영순의 집으로 모였다. 이들의 공통된 목표는 독립군이 되는 것이었다. 독립군이 되기 위해선 튼튼한 몸과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독수리소년단’은 한밤중에 집에서 약 2km 떨어진 공동묘지에 다녀오는 훈련으로 담력을 쌓고 병정놀이 등으로 체력과 정신력을 길렀다. 더불어 독립운동에는 자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따라 닭을 키우고, 동네 공터에 보리·콩 등의 작물을 심고 경작해 그 수입으로 조직의 경비를 조달했다. 1942년에 들어서자 ‘독수리소년단’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무기 구할 방법이 없으니 민족 단결을 촉구하고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벽보를 붙이는 독립운동을 실행한다. 같은 해 2월 하순의 어느 날 저녁, 마침내 장호원 읍내 곳곳에 ‘조선 독립과 민족 단결’을 촉구하는 항일 벽보를 붙인다. 박승연과 단원들은 습자지와 한지에 먹으로 항일 내용을 썼고 조장을 맡은 김순철(당시 14세)이 김만식과 함께 시내 곳곳에 항일 벽보를 붙였다. 장호원 읍내 담벼락과 전봇대, 그리고 장호원터미널에 주차 중이던 시외버스 등에 항일 벽보를 붙였다. 박영순 단장은 따로 일제에 협조하지 말고 자주정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써 전국 각지의 현직 군수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독수리소년단은 모두 검거되고 만다. 일본 경찰은 배후가 있을 것으로 추측, 11세에서부터 17세까지의 어린 소년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단원 박승연은 열여 섯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利川獨立運動史』에 의하면 독수리소년단원이자 박영순의 동생 박기순과 또 다른 단원 이상진도 고문사 했다고 한다. 단장 박영순은 2년 넘게 인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일 202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