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말부터 제주도사(濟州島司)가 회장을 겸임했던 제주도 해녀조합은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식민지 수탈 기구로 전락하면서 해녀들이 채취한 생산물을 착취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해녀들은 시정을 요구하며 진정서를 제출하였지만 제주도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구좌면 하도리의 해녀들이 앞장서 1932년 1월 7일 구좌면 세화리 오일장에서 대규모로 항일 투쟁을 감행했다. 300여 명의 해녀들은 손에는 빗창을 들고 머리에는 수경을 끼고 제주도해녀조합의 착취를 성토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이 지역 조합지부장은 구좌면장이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녀 대표들은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면장에게 제시했으나, 면장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며 12일에 제주도사가 오면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1월 12일, 신임 제주도사 다구치 테이키(田口禎憙)가 순시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해녀 천여 명이 집결하였다. 해녀들은 제주도사가 탄 차를 가로막고, “우리들의 진정서에 아무런 회답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항의하였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제주도사는 5일 내에 요구 조건 해결을 약속하고 위기를 모면했으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시위에 참여한 많은 해녀들이 고초를 당하였고, 특히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은 6개월 동안 고초를 겪었다. 이 운동은 부춘화(당시 25세) 김옥련(당시 23세) 부덕량(당시 22세) 등이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키웠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일 2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