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양군 양양 3.1만세운동 태극기 제작소 터
양양에서 1919년 4월 4일 장날의 만세 군중에게 배포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었을까? 더구나 일본경찰의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 장날을 하루 앞둔 3일 밤에 임천리에서 일부가 발각되었다. 양양에서는 각 면별로 책임자를 정하고 구장 집과 서당에서 만들기가 한창이었는데. 임천리에서 이석범 선생의 주도하에 이교완(李敎完), 이교정, 이건충 등 몇 집에서 만들다 장날을 하루 앞둔 3일 일부가 발각되어 이석범 선생을 비롯한 마을주민 20여 명이 체포되고 태극기 374매와 등사기가 압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서면은 상평리 박춘실(朴春實)이 임천리에서 만든 종이 태극기를 이교학으로부터 전달받아 집에서 수기로 만들었고, 현북면은 상광정리 김종대 집과 하광정리는 구장인 김진혁 집에서, 말곡리는 문종석 집에서, 도리는 김재한 집에서 각각 만들었다. 강현면도 구장 집과 서당 훈도였던 김철기(金鐵起·독립유공자)의 서당에서 만들었고, 도천면은 중도문리 이종국(李種國·독립유공자), 이종황의 집에서, 물치리는 김두영(金斗榮·독립유공자), 박제범, 김대순 등이 태극기를 만들며 계획에 참여하였다.
양양면은 양양감리교인이며 면사무소 급사였던 김필선(金弼善·독립유공자)이 조화벽 지사에게 받아 김계호(金啓鎬·독립유공자), 김주호, 김재구, 김규용 등 동료들과 면사무소의 등사기로 종이와 옥양목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그리고 거마리는 김종태(金種台:2018년 8월, 독립유공자 신규신청) 집에서, 감곡리는 이관진(李寬鎭·독립유공자) 주도하에 이상온 집에서 만들었다.
손양면에서는 가평리와 왕도리에서 제작하였으나, 주리와 우암리는 준비가 부족하여 태극기 대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깃발을 들고 백가영감이 농악을 울리며 만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자, 다급해진 임천리 최인식(崔寅植)을 비롯한 책임자들은 거마리 김종태 집으로 피신하여, 각 마을 책임자들에게 긴급히 연락을 취하고 대책을 세웠다.
그러자 일본 경찰의 감시가 더욱 강화되자, 비상 대책으로 인적이 없는 안전한 장소를 선택한 곳이 바로 곳집[喪具保管所]이었다. 거마리는 김종옥 집 뒷산 외진 곳집으로 정하였고, 또한 성내리 뒷산에 있는 곳집(성내리 47번지)에서도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이때 조화벽 지사도 86매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케 한다. 이렇게 밤새워 만든 태극기를 다음 날인 4일 장날에 배포하여 전군민이 참여한 민족의거 운동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