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양군 양양 3.1만세운동지-기사문리 만세고개
강원 양양군 현북면에서는 4월 7일과 9일에 주민들이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7일의 운동은 9일의 운동계획이 일부 발각되면서 일어났다. 현북면 원일전리, 장리, 도리의 주민과 서당 생도 300여 명이 양양읍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경찰저지선이 완강하여 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임천리와 용천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경찰을 향해 감금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4월 9일의 운동은 기사문운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양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운동으로 기독교인과 유학자 그리고 각 마을의 구장들이 합심하여 전개한 대규모 운동이었다.
운동의 계획은 원래 원일전리 유학자 박원병(朴元秉) 형제와 감리교회 청년 오세옥(吳世玉)·이응렬(李應烈)과 면내 유지급인 중광정리의 임병익(林秉翼)과 오정현(吳鼎鉉)이 합세하여 각 마을 구장들과 함께 추진하였다. 양양 장날인 4월 9일에 시위를 계획하던 중 박원병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가 체포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렇지만 9일의 운동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일단 면사무소와 그 주변에 모인 군중은 그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양양읍으로 가려 했지만 지도자급의 의견 충돌과 이 지방의 원로인 김익제가 읍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여 관할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4월 9일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군중은 일제측 기록에 600여 명으로 되어 있으며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모인 군중은 일단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 있는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서는 이러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여, 8일에 이미 강릉으로부터 지원부대가 도착해 있었다. 일제 군인과 경찰은 주재소 옆 개울 언덕에서 군중을 향하여 총을 겨누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순사 이홍근만이 군중의 선두가 있는 다리목에 나와 있었다. 군중은 이홍근이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향하려고 했다. 이때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현장에서 9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20명이 나오며 군중의 선두는 피바다가 되었다.
기사문리 만세운동 유적비
1919년 4월 9일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고개에서 현북면민이 독립만세 시위 를 전개하던 곳으로 이곳 기사문리 만세고개에서 현북면 만세 군중들이 기사문리 주재소로 진군하던 중 일제의 총탄에 9명의 사망자와 2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유적지는 당시 희생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게 알리고자 양양 31만세운동 유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 2000년 3월 1일에 조성되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