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은 지휘관의 자질과 훈련을 중시하는 '인간중심론적 전투수행론'과 첨단무기 보유 여부에 방점을 두는 '기술결정론적 전투수행론'이 절묘하게 조합한 결정체였다.특히 '인간중심론적 전투수행론'에서는 매복과 기습전이라는 유격전을 구사한 홍범도, 김좌진 장군 등의 뛰어난 리더십이 승리를 견인했다.그러면, '기술결정론적 전투수행론'으로 설명되는 첨단무기 보유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다.
체코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지였다.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오스트리아에 징집된 체코인들은 발칸반도 일대의 동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범슬라브 민족주의 열풍으로 같은 슬라브 계열인 러시아에 대거 투항하여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제정 러시아 육군 6만 명의 체코군단으로 결집시켰다. 그들의 눈과 총구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등장한 러시아 혁명 정부는 체제 안정을 위해 이듬해 3월 3일 연합국(영·미·프)일원에서 이탈하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독일과 체결한다. 이에 체코망명정부는 연합국과 함께 러시아 혁명정부에 압박을 가해 "체코군단을 시베리아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동시키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일본군을 포함한 2만 5천명 규모의 연합군을 시베리아로 출병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1918년 5월 러시아 적군과 백군 간의 내전이 확대되자, 제국 일본은 시베리아 장악을 목적으로 협약을 무시한 채 1개 군단 규모의 7만 명을 파견한다. 이때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체코 군단은 이동 중인 기차에서 '체코 덴니크' 신문을 발행해 3.1운동 관련 사건을 3회 보도하여 우리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깊이 각인시켰다.
한편, 체코는 1918년 10월 28일 건국 선포하고 11월 11일 전쟁 종료와 함께 독립을 쟁취한다. 그리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고 있던 체코 군단은 효용성이 사라진 무기를 대거 독립군에게 판매한다. 이와 관련해 북로군정서 이우석 분대장 회고에 의하면, "무기 구입 자금이 루불화였는데 혁명으로 휴지 조각이 돼 버려 다시 신권을 모으긴 했으나 모자라는 돈은 현지 동포들의 은비녀와 금가락지 등 온갖 귀중품으로 대신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북로군정서가 소총 1800정, 기관포 7문, 대포 3문 등을 갖춘 북간도 최강의 독립군 부대로 발전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이처럼 청산리 전투는 비단 독립군뿐만 아니라, 현지 동포들이 음지에서 정보원 역할은 물론 식량과 보급품 지원 등이 있었기에 얻어진 값진 승리였다. 청산리 대첩의 또 다른 축이었던 체코군단으로부터 첨단 무기구입은 우리의 독립운동사 시각을 한반도와 중국 대륙이 아닌, 세계사적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