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원 천연희 딸 매리 길 자바우프
천연희 (1896-1997)
경남 진주 출신인 천 씨는 1915년 6월 29일 스무살의 나이로 하와이 마우이섬 파이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길찬록 씨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하와이에서 대한부인구제회 활동으로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집하였다. (‘사진 신부’란 하와이에 이민한 신랑감의 사진만 보고 편지로 결혼을 약속, 결혼 이민을 떠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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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어머니(천연희)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아시거나 들으신게 있다면?
답: 교회 사람들이랑 기금 모음 같은 일 하려고 다양한 활동 했는데 우리 엄마는 항상 참여했다. 부인구제회 사람들은 한국을 위해 살았다. 그들의 삶이었다. 그들의 삶은 이승만과 한국의회를 위한 삶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승만은 한국사람들이 서로 잘 모이게 했고 뭐 .. 이승만은 한국을 좋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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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어머니(천연희)는 대한부인구제회에서 어떤활동을 하셨나요?
답: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 여성들은 서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좋은 것은 이승만과 한국 의회는 한국 사람들끼리 서로 아주 잘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서로 도우고 지지하고 항상 협력하며 살았다. 요즘에 보더라도 교회는 서로 끈끈하게 지낸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사람들끼리 매우 가깝게 지내고 이승만 교회도 그들끼리 항상 매우 가깝고 협력하고 어떤 종류로든 기금 모집하고 뭐 김치 만들고 그랫다. 우리 엄마도 매우 흥미로워했고 교육에도 관심이 있었다. 대학에도 다녔고 교육과 이승만, 이승만 의회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서 엄마는 항상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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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답: 우리는 돈 받을 생각 없어요. 그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독립운동하고 나라 생각하는 마음으로 했지 돈 바라고 한 게 아니에요. 어머니는 항상 돈이 부족했어요. 돈이 없어서 못했죠. 아이들 공부 다 시키려는 게 제일 문제였어요. 마음으로는 이승만에게 돈 주고 싶었지만 자기한테 좋은 것 들어오는 거 생각하고 한 게 아니에요. 그녀는 절대 그러지 않았을거라 생각해요. 우리 어머니 살아있을 때 그런 생각 안했어요.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 : 2015년)